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으나 부득이 해야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요, 자기는 하고 싶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지 않는 것은 그만둘 수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항상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그만둔다.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할 수 있으나,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한 때로는 그만둔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 도무지 일이 없을 것이다. // 세상천지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음을 알게 됨
나의 병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용감하지만 지모가 없고 선(善)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을 모르며, 맘 내키는 대로 즉시 행하여 의심할 줄을 모르고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그만둘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마음에 기쁘게 느껴지기만 하면 그만두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이 꺼림칙하여 불쾌하게 되면 그만둘 수 없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세속 밖에 멋대로 돌아다니면서도 의심이 없었고, 이미 장성하여서는 과거 공부에 빠져 돌아설 줄 몰랐고, 나이 삼십이 되어서는 지난 일의 과오를 깊이 뉘우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선을 끝없이 좋아하였으나, 비방은 홀로 많이 받고 있다. 아, 이것이 또한 운명이란 말인가. 이것은 나의 본성 때문이니, 내가 또 어찌 감히 운명을 말하겠는가.
내가 노자의 말을 보건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라고 하였으니, 아, 이 두 마디 말은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 대체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뼈를 에듯 하므로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건너지 않으며, 사방의 이웃이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기 몸에 이를까 염려한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 하고 싶은 일에 나서다가 주위의 비방을 받았던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노자의 말을 되새김
편지를 남에게 보내어 경례(經禮)의 이동(異同)*을 논하고자 하다가 이윽고 생각하니,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었다. 하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 아니므로, 부득이한 것이 아닌 것은 또 그만둔다. 남을 논박하는 소(疏)를 봉(封)해 올려서 조신(朝臣)의 시비(是非)*를 말하고자 하다가 이윽고 생각하니, 이것은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마음에 크게 두려움이 있어서이므로, 마음에 크게 두려움이 있는 것은 또 그만둔다. 진귀한 옛 기물을 널리 모으려고 하였지만 이것 또한 그만둔다. 관직에 있으면서 공금을 농간하여 그 남은 것을 훔치겠는가. 이것 또한 그만둔다. 모든 마음에서 일어나고 뜻에서 싹트는 것은 매우 부득이한 것이 아니면 그만두며, 매우 부득이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그만둔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만두고, 매우 부득이하더라도 남들이 알까 두려운 일을 그만두면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없을 것임을 깨달음
내가 이 뜻을 얻은 지 6~7년이 되는데, 이것*을 당(堂)에 편액으로 달려고 했다가, 이윽고 생각해 보고는 그만두었다. 초천(苕川)에 돌아와서야 문미(門楣)에 써서 붙이고, 아울러 이름 붙인 까닭을 적어서 어린아이들에게 보인다. // 자신의 깨달음을 글로 써서 문미에 써 붙이고 아이들에게 보여 줌
*경례의 이동: 경전이나 예법 해석의 같고 다름.
*조신의 시비: 신하들이 낸 의견의 옳고 그름.
*이것: 앞에서 언급한 ‘여유(與猶)’라는 노자의 말을 이름.
●줄거리
*어떠한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나의 문제는 두려워할 줄 모르고 그만두어야 하는 것들을 제때 그만두지 못했다.
*앞으로 노자가 말한 ‘여유’를 떠올리며 항상 신중하고 경계하며 살아야겠다.
*하고자 하는 일 중에 매우 부득이한 것이 아니면 그만두며,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만두겠다.
*나의 깨달음을 문미에 써 붙이고, 어린아이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핵심정리
▶갈래 : 고전수필, 한문수필, 기(記)
▶성격 : 교훈적, 고백적
▶주제 :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아야 함을 깨달음.
▶특징 :
-자신이 실제 체험한 일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될 교훈으로서 자신이 얻은 깨달음이나 가치관을 전달하고 있다.
-초천에 돌아와서 살게 된 집에 ‘여유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을 밝히면서 자신이 왜 그러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였는지를 기록하여 잊지 않고 기억하려하고 있다.
-자신의 행동을 선택함에 있어 주변 상황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함.
-자신이 과거에 했거나 떠올려 보았던 행동들을 나열해 부득이한 일이었는지의 여부를 따져봄.
-'여유당'의 '여유'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언급하며 그와 관련된 깨달음을 서술함.
-한문 양식 '기(記)'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마지막 부분에서 집필 의도를 드러냄.
-앞 문장의 구절을 그대로 이어받는 연쇄법을 활용해 사고의 과정을 드러냄.
-자문자답의 형식을 활용해 삶에 대한 태도를 드러냄.
-의문형 문장을 사용해 글쓴이의 의도를 강조함.
●구성
처음: 세상천지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음을 알게됨.
중간 1: 하고 싶은 일에 나서다가 주위의 비방을 받았던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노자의 말을 되새김.
중간 2: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만두고, 매우 부득이하더라도 남들이 알까 두려운 일을 그만두면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없을 것임을 깨달음.
끝: 자신의 깨달음을 글로 써서 문미에 써 붙이고 아이들에게 보여 줌.
●이해와 감상
조선 정조 때 정약용이 지은 한문 수필로 갈래적으로는 기(記)에 해당한다. 정조 사후 정약용이 고향 마현으로 내려가 머물게 되는데, 이때 그가 머문 집의 이름이 여유당이다. ‘여유(與猶)’라는 이름은 노자의 말에서 왔는데, ‘신중하고 경계하라.’라는 의미이다.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고 지내면서 남의 비방을 자초하지 않겠다는 글쓴이의 다짐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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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수
